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화장실

 

잠깐 차창에 기대 눈을 감았던 것 같았는데 어느새 창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무슨 공터 같은 곳이었는데, 이따금씩 비 속에서 저녁 산책을 하는 몇몇의 사람들의 풍경들로 보아 도심 속 소공원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운전석에는 박이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요의가 심하게 느껴졌다. 남회장에게 능욕을 당하던 어느 순간부터 시작된 아랫배의 요의는 금방이라도 터져나올 듯한 기세로 아랫배를 팽창시켜 왔다.
능욕의 시간이 끝나고 욕실에서 어떻게든 해결을 하고 싶었지만, 욕실 안이 훤히 보이는 유리벽 건너편으로 남회장의 모습이 어른거려 결국 소변을 해결하지 못했었다. 

무작정 차문을 열고 나와 소변을 해결할 만한 곳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공원의 맞은편 구석에 화장실로 보이는 건물에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휴지통 밖으로도 휴지 뭉치들이 지저분하게 떨어져 나왔을 정도로 화장실 내부는 청결하지 못했다.
변기 안에는 담배꽁초가 푹 퍼진 채로 떠 있었고, 한 눈에 봐도 불결하기 짝이 없는 변기의 위생 상태는 아무리 급해도 엉덩이의 맨살을 대고 소변을 보기가 어려워 보였다. 

휴지로 변기의 받침대를 닦고 난 후, 다시 그 위에 휴지를 곱게 펴서 깔아놓은 다음, 치마를 걷어 올리고 팬티를 내려 변기 위에 앉았다.
앉아마자 무서운 속도로 소변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화장실 밖의 벽을 따라 움직이던 목소리가 앉아 있는 변기 칸 쪽으로 가깝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누군가 화장실 건물의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며 휴대 전화로 통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화장실을 처음 들어서기 전부터 그 목소리는 화장실 외벽을 따라 왔다갔다하며 들려오고 있었지만,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소리에 가려 그 음성이 뚜렷하게 인지되지는 않았었다.
워낙 아랫배의 요의가 급했고, 더러운 변기를 닦아내느라 정신이 팔려 그 목소리에 주위를 기울일만한 상황은 안 됐었는데, 변기 위에 앉아 안정을 되찾는 그 순간부터 바깥의 그 목소리에 자연히 신경이 쓰이게 됐다. 

그리고 바로 옆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그 목소리가 내가 앉아있는 변기 칸 바로 밖에서 들려오기 시작하자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박이사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하하! 그러게 말이에요. 여자란 원래 따 먹어야 맛인데....암튼 형님이 부럽....”
박이사의 목소리가 내가 앉아있는 변기 칸을 지나치면서 그의 목소리도 빗소리에 묻혀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
앞뒤 통화 내용을 다 알 수가 없어서 뭐라 판단할 수는 없었지만, 내 옆을 지나치면서 들려오던 박이사의 말은 왠지 모를 불쾌함을 가져다주었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박이사가 내뱉은 ‘따먹어야 맛인 여자’가 어쩌면 나를 두고 한 말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은 너무나 비약적인 추측이다 싶어 금새 잊혀지고 말았다.
다만 여자를 따먹는다느니 하는 식의 표현을 쓰는 박이사에게 적잖이 실망감이 들었고, 차분하고 젠틀하게 느껴지던 그의 이미지가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 같아 속이 상해왔다.
하지만 그 역시 누군들 자기만의 사적인 공간에서는 그런 표현을 쓰지 않는 사람이 있겠나 싶어, 소변을 다 마치고 차로 다시 돌아가던 도중에는 박이사의 전화 통화에 대한 불쾌함은 거의 지워져가고 있었다.